인류 문명과 에너지 패러다임 변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나무 기반 에너지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항상 에너지원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에너지원이 있기에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에너지의 패러다임을 장악한 국가가 전 세계 발전을 선도하면서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수 천 년 전에는 세계 각지에서 인류의 문명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형성된 곳은 레반트 지역이라고 하는 지금 이라크, 시리아 일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기반으로 발전했는데요. 큰 강이 두 개가 흐르는 땅은 수많은 나무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나무로 불을 지피는 행위 즉, 열에너지를 이용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수메르 문명,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 문명, 최초의 제국을 이뤘던 아시리아 제국,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 등 고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던 나무로부터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된 레반트 지역을 보면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황량한 사막이 대부분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인류가 나무를 베어서 열에너지로 사용하면서 황폐화 된 것 입니다. 레반트 지역의 나무가 사라지자 각 도시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어졌고, 이는 문명의 후퇴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화석 에너지(석탄, 석유, 천연가스)의 등장과 산업혁명
두 번째로 인류가 문명의 도약을 이뤄낸 것은 바로 화석 에너지입니다. 화석 에너지란 우리가 알고 있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에너지원이죠. 이 중에서 먼저 사용된 것은 석탄입니다.
18세기 영국은 브리튼섬 북부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탄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이뤄냈습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열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의 효과적인 변화를 만들어냈고, 이는 에너지가 인간의 힘을 대신하는 기계의 발전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증기기관, 가솔린엔진, 디젤엔진, 제트엔진으로 이어지는 발전은 석탄에서 석유로 이어지는 에너지원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주된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넘어가면서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미국 등이 글로벌 패권을 쥐게 됐죠.
더 나아가 인류는 열에너지를 통해 전기에너지를 만들어냈고, 이는 오늘날 디지털혁명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창조했습니다.
이처럼 발전한 인류의 문명은 우리에게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편리함과 새로운 경험을 주었지만, 이 같은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과거 어떤 세대보다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게 됐습니다.
에너지원이 고갈되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처럼 붕괴되는 건 한 순간 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인류는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석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거든요. 또한 화석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면서 지구 온난화라는 후대의 부채도 겉잡을 수없이 커지는 상황입니다.
원자력 에너지와 기존 원전의 한계
이 때문에 나온 에너지원이 원자력입니다. 원자핵을 분열해 발생한 열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는 이 기술은 사실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 역시 완벽하진 않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커다란 사업이기 때문이죠. 원전이 들어서는 엄청난 부지를 마련하는 것도, 원전 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냉각수를 확보해야하는 원전 특성상 바닷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바닷가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요가 많은 서울과 수도권에 끌어올리는 송전망 문제도 큰 어려움입니다.
소형모듈원자로(SMR)의 등장과 가능성
이 때문에 전 세계 선진국들은 문명의 발전을 이어가는 것과 동시에 에너지원 확보를 통한 글로벌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 ‘게임체인저’라고 알려진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생소한 용어인 SMR은 쉽게 말해 오늘날 원전보다 크기가 월등히 작은 원자로입니다. 현재의 원전보다 전기생산량은 다소 적지만, 크기와 구축 비용 측면에서는 월등한 효율성을 발휘합니다.
또한 반드시 바닷가에 위치하지 않아도 되면서, 전기 수요가 많은 수도권이나 산업단지 근처에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기를 먼 거리에서 가져와야 하는 송전망 이슈도 쉽게 해결될 수 있죠.
비유하자면, 20세기에는 사람 주먹보다 큰 진공관에서 새끼손가락 보다 작은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면서 가정용 컴퓨터(PC)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트랜지스터를 무려 나노미터 급으로 작게 만든 반도체 공정이 생기면서 오늘날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혁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원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원자력발전의 크기가 지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SMR로 작아지면 이를 통해 새로운 지평선이 열릴 가능성이 크죠. 엄청난 전기를 소모하는 AI의 발전이 대표적인 예 입니다.
더 나아가 SMR은 영화 어벤져스로 유명한 마블시리즈 아이언맨의 아크원자로 같이 작아질 수 있는 상상력도 불어넣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손바닥 만한 아크원자로 역시 큰 틀에서 보면 핵분열과 핵융합이라는 핵공학에서 출발하거든요.
글로벌 SMR 경쟁과 한국의 역할
이미 미국이나 러시아 등 원전 설계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각자 SMR 모델을 가지고 있거나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미국의 경우 바이든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빌 게이츠가 투자한 테라파워 등을 통해 2030년 전후로 글로벌 SMR 시장이 크게 확대될 전망입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도 선거 기간 동안 대형 원전을 짓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만큼,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SMR 개발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늘날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을 포함해서 국내 원전 기업들은 SMR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설정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에서 0.7GW규모의 SMR 1기를 건설하는 내용을 사상 처음으로 포함했습니다.
또 SMR 시장에 뛰어든 국내 회사만 해도 SK그룹, 두산에너빌리티, HD현대중공업, DL이앤씨, 삼성물산, 현대건설 등 여섯 곳이나 됩니다.
물론 SMR 개발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돈이 들어가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원전 강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 입장에서 SMR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일수록 말입니다.
그럼에도 SMR 산업은 반도체 산업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구글,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가 설계하고 대만 TSMC가 이를 제작하는 것처럼, SMR도 테라파워, 뉴스케일 등 미국의 설계·운영 업체가 설계 의뢰를 하면 시공을 한국 기업이 맡는 식이죠. 이 때문에 SMR이 제 2의 반도체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습니다.